수제맥주, 그 이름이 전하지 못한 크래프트 맥주 이야기

craft의 사전적 의미

수제맥주(Craft beer). ‘craft’를 사전에서 찾으면, 첫 번째 뜻은 ‘공예’, 두 번째는 ‘기술, 기교’다.
그런데 세 번째 뜻에는 ‘손으로 공예품을 만들다’라는 동사적 의미가 등장한다.

한국에서 craft beer가 ‘수제맥주’로 번역된 배경에는, 아마도 이 세 번째 뜻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크래프트 비어에서 craft가 담고 있는 의미는 ‘손으로 만든다’는 것이 아니다. 본래의 뜻은 대기업의 획일적인 맥주에 맞서, 양조자 개인의 철학과 개성을 담아 만든 맥주라는 뜻에 가깝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수제맥주’라는 번역이 본래의 의미를 왜곡한다며 탐탁치 않게 여기기도 한다.

‘수제’, 즉 ‘손으로 만든 맥주’라는 글자만 보면, 정작 크래프트 비어가 내세우는 독립성이창의성 같은 핵심 가치 대신 수제라는 단어가 가진 마케팅적 의미만 보여지기 때문이다.

물론 대중에게 낯선 ‘크래프트 맥주’라는 외래어 대신, 이미 익숙한 ‘수제’라는 단어를 택한 것은 얼핏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쉽고 친숙한 단어를 선택한 대신, craft라는 말 안에 담겨 있던 독립성, 실험정신, 대기업 맥주에 대한 저항 같은 의미를 전달할 방법을 통째로 상실했다는 것에 있다.

‘수제맥주’라는 네 글자를 처음 접한 사람이 떠올리는 이미지는, 십중팔구 ‘누군가 손으로 직접 만든 맥주’일 것이다. 이 문제는 내 생각에는 단순한 번역의 아쉬움으로 끝나지 않았다.

뒤에서 다루겠지만, 한국 수제맥주 시장이 편의점 4캔 만원 경쟁에 빠져들면서 제품의 퀄리티가 하락했을 때, 소비자들이 “그래서 수제맥주가 일반 맥주랑 뭐가 다른데?”라는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한 것도 결국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

‘수제’라는 단어가 크래프트 비어만의 장르적 정체성을 전달하지 못했기에, 품질마저 흔들리자 소비자가 이 맥주에 계속 호기심을 가질 이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미국양조협회(BA)는 ‘소규모, 독립적, 전통적’이라는 공식 기준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 정의만으로도 현실의 복잡한 사례들을 담아내기엔 부족하다.

크래프트 비어라는 단어에 담긴 복잡한 의미와 역사, 한국 시장에서 ‘수제맥주’는 왜 소비자에게 제대로 각인되지 못했는지. 이 글에서는 수제맥주, 크래프트 맥주의 정의와 한국 수제맥주 시장의 변화까지 하나씩 내 생각을 얘기해보려고 한다.

수제맥주, 크래프트 비어란 무엇인가

크맥 샘플러

한국에서 수제맥주로 통하는 크래프트 비어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맥주다. 잔 안에 담긴 것이 기준인지, 아니면 누가 양조했느냐가 기준인지도 모호하다.

미국에서 말하는 공식적인 기준은 있다. 미국양조협회(Brewers Association)는 2007년 크래프트 브루어의 정의를 발표했는데, 그 핵심은 세 가지였다.

미국양조협회(BA)의 크래프트 브루어 정의

1. Small(소규모) — 연간 생산량 600만 배럴 이하

2. Independent(독립적) — 크래프트 브루어가 아닌 외부 기업의 지분이 25% 미만

3. Traditional(전통적) — 주력 제품이 올몰트(all-malt) 맥주일 것

하지만 이 정의도 완벽하지 않다.《The Complete Beer Course》의 저자 조슈아 번스타인(Joshua Bernstein)은 한술 더 떠서 크래프트 비어를 이렇게 평가했다. “사실상 아무 의미도 없다. ‘장인이 만든(artisanal)’이나 ‘수제(handcrafted)’만큼이나 쓸모없는 수식어다.”

번스타인이 이렇게까지 말한 데는 이유가 있다. BA의 세 가지 기준을 현실에 대입해보면, 금방 모순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발라스트포인트

대표적인 사례가 발라스트 포인트(Ballast Point)다. 샌디에이고의 홈브루 용품점 뒷방에서 시작해, 스컬핀 IPA로 미국 크래프트 비어 씬의 아이콘이 된 양조장이다.

2015년, 코로나·모델로를 소유한 거대 주류기업 컨스텔레이션 브랜즈가 이 양조장을 10억 달러에 인수했다. 그 순간 BA의 정의에 따라 발라스트 포인트는 더 이상 ‘크래프트 브루어’가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양조장은 인수 후에도 같은 양조팀이 같은 레시피로 같은 맥주를 만들고 있었다. 20년 넘게 발라스트 포인트에서 일한 양조사 콜비 챈들러(Colby Chandler)는 “같은 사람들이 같은 맥주를 만들고 있다. 달라진 건 시설과 장비가 좋아졌다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잔 안의 맥주는 그대로인데, 서류상의 지분 구조가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어제까지 크래프트였던 맥주가 오늘부터 크래프트가 아닌 것이다.

구스아일랜드탭룸구스 아일랜드(Goose Island)도 마찬가지다. 1988년 시카고의 작은 브루펍에서 출발해 미국 크래프트 비어 혁명의 선구자로 자리 잡은 양조장이다. 2011년 세계 최대 맥주 기업 AB InBev에 인수되면서 역시 BA 기준의 크래프트 지위를 잃었다.

그런데 구스 아일랜드의 버번 카운티 스타우트(Bourbon County Stout)는 인수 이후에도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배럴 에이징 맥주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50종이 넘는 스타일을 양조하고, 전용 배럴 숙성 창고까지 운영하며, 해마다 실험적인 맥주를 선보인다.

양조 철학과 품질만 놓고 보면 어떤 독립 양조장보다 크래프트의 정신에 충실한데, 소유 구조 하나 때문에 크래프트가 아닌 셈이다.

결국 이런 사례들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다. 잔 속의 맥주가 아닌 다른 요소로 크래프트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래프트 비어라는 단어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가 있다. 결국 이 단어는 품질에 대한 강조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크래프트’는 ‘핸드크래프트’를 연상시키며, 단순히 양조장의 작은 규모가 아닌 품질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말이었다.

결국 크래프트 비어란, 대기업의 마케팅 부서가 아닌 양조자 자신의 열정과 철학에서 비롯된 맥주를 가리키는 말이다.

크래프트 비어와 일반 맥주, 무엇이 다른가

다양한 크래프트 맥주크래프트 비어와 대기업 맥주는 양조 방식 자체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첫째, 크래프트 브루어들은 하이 그래비티 브루잉(high-gravity brewing)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이 그래비티 브루잉이란 맥주를 높은 도수로 양조한 뒤, 포장 직전에 물을 섞어 부피를 늘리는 대량 생산 방식이다.

예를 들어 7.5% 도수로 만든 맥주에 50%의 물을 더하면 5%짜리 맥주가 되는데, 이렇게 하면 양조 공간을 3분의 1이나 절약할 수 있다.

둘째, 부원료(adjuncts)의 사용 목적이 다르다. 대기업 맥주는 옥수수나 쌀 같은 부원료를 맥주의 바디를 가볍게 하고 원가를 낮추기 위해 사용한다.

미국에서 가장 저렴한 맥주에는 법이 허용하는 최대치인 50%까지 부원료가 들어간다. 반면 크래프트 브루어들이 부원료를 쓸 때는 특정한 풍미를 내기 위한 목적, 즉 양조자의 의도가 담겨 있다.

구분 대기업 맥주 크래프트 비어
양조 철학 비용 절감, 대량 생산 효율 양조자의 개성과 창의적 레시피
하이 그래비티 브루잉 보편적으로 사용 사용하지 않음
부원료 사용 원가 절감 및 바디 경량화 목적 풍미 창출 등 의도적 사용
맥주 스타일 소수의 맛 프로필에 집중 다양한 스타일과 풍미 추구
독립성 글로벌 기업 소속 또는 계열사 독립 운영 원칙 (외부 지분 25% 미만)

양조 철학이 다르고 제조 방식이 다르다는 것은, 결국 잔에 따랐을 때 맛이 다르다는 뜻이다. 대기업 맥주가 누구에게나 무난하게 마실 수 있도록 맛의 모서리를 깎아낸 제품이라면, 크래프트 비어는 양조자가 의도한 개성이 그대로 살아 있는 맥주다.

맥주에는 놀라울 만큼 다양한 스타일이 존재한다.

시트러스와 솔향이 화려하게 터지는 아메리칸 페일 에일, 그보다 한층 더 쓰고 강렬한 IPA, 로스팅한 맥아에서 초콜릿과 커피 향이 올라오는 스타우트, 바나나와 정향의 향긋함이 특징인 독일식 밀맥주 바이젠, 체코 필젠에서 탄생한 황금빛 필스너까지.

맥주 스타일 차트를 보면, 쓴맛의 강도와 알코올 도수의 조합만으로도 수십 가지 스타일이 저마다 다른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대기업 맥주는 이 넓은 스펙트럼 가운데 딱 한 지점에 머물러 있다. 바로 아메리칸 어드정트 라거(American Adjunct Lager), 옥수수나 쌀 같은 부원료를 넣어 바디를 최대한 가볍게 만든 페일 라거 스타일이다.

카스, 하이트, 버드와이저, 하이네켄 모두 세부적인 차이는 있어도 결국 이 한 가지 스타일의 변주에 가깝다. 크래프트 비어는 이 스펙트럼 전체를 탐험한다.

같은 ‘맥주’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카스 한 캔과 버번 배럴에서 숙성한 임페리얼 스타우트 한 잔은 사실상 전혀 다른 음료에 가깝다. 그 차이를 직접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 크래프트 비어가 존재하는 이유다.


“수제맥주”라는 번역이 부르는 오해

한국 수제맥주 판매대

한국에서 크래프트 비어는 흔히 ‘수제맥주’라고 불린다. 뜻을 한자 그대로 풀면 ‘손으로 만든 맥주’라는 뜻이다.

바로 여기서 오해가 시작된다. ‘수제’라는 단어는 한국어에서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으로 직접 만든 것”이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크래프트 비어를 듣고 “아, 가게에서 직접 만든 맥주?” 혹은 “기계 안 쓰고 손으로 만드는 건가?”라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영어 단어 ‘craft’의 의미는 ‘수제’보다 훨씬 넓다. craft의 어원은 고대 영어에서 ‘힘(force)’을 뜻하는 단어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기능, 기예, 솜씨, 특수한 기술을 요하는 직업”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현대 영어에서 craft는 숙련된 기술이 필요한 작업 전반을 가리키며, craftsman은 ‘장인’으로 번역된다.

즉, 크래프트 비어라는 말의 본래 뜻은 “손으로 만든 맥주”가 아니라 “장인의 기술과 철학이 담긴 맥주”에 가깝다. 여기에 ‘실험정신, 혁신,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라는 의미까지 더해진다. 크래프트 브루잉의 핵심은 선도자(leader)이지, 추종자(follower)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크래프트 비어 운동은 대기업 맥주의 획일화에 맞선 일종의 문화적 반란으로 시작되었다.

‘수제’가 놓치는 것들

craft의 핵심은 ‘손으로 만든다’는 물리적 방식이 아니라, 양조자의 독립성, 창의성, 그리고 대량 생산 맥주에 대한 대안적 정신이다. 실제로 많은 크래프트 양조장은 최첨단 장비와 컴퓨터를 활용한다. 손이 아니라 정신이 ‘크래프트’의 본질이다.

그럼에도 “수제맥주”라 쓸 수 밖에 없는

번역의 한계가 분명함에도 한국에서 ‘수제맥주’라는 단어를 대체하기는 어렵다. ‘크래프트 맥주’라고 그대로 쓰면 일반 소비자에게는 여전히 낯설고, ‘장인 맥주’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게 들린다. ‘독립 맥주’, ‘소규모 맥주’ 같은 표현도 크래프트의 정신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수제맥주_크래프트맥주_크래프트비어_검색량 차이국내 시장에서 수제맥주는 이미 “대기업 3사와 수입맥주를 제외한 소규모·중소 맥주사들이 만든 제품”으로 통용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소비자와 업계 모두 이 정의를 대체로 수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크래프트 비어의 탄생 — 미국에서 시작된 맥주 혁명

앵커 브루잉의 스팀비어 깃발

크래프트 비어가 왜 등장했는지를 이해하려면, 미국을 비롯한 대기업 맥주 시장이 어떻게 단 하나의 스타일로 수렴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미국에는 독일 이민자들이 가져온 다양한 라거 문화가 있었다. 하지만 1920년 금주법 시행 이후 약 2,000개의 양조장이 750개로 줄었고, 살아남은 양조장들은 전쟁과 대공황을 거치며 수십 년에 걸친 가격 경쟁과 기업 통합에 돌입했다.

원가를 낮추기 위해 옥수수와 쌀 같은 부원료 비율은 점점 높아졌고, 대형 양조회사는 인수한 소규모 양조장의 맥주를 전부 같은 페일 라거로 바꿔버렸다. 1970년대 말, 미국에는 50개 미만의 양조회사만 남았고 거의 전부가 같은 맛으로 원가 절감에 최적화된 아메리칸 어드정트 라거를 생산하고 있었다.

이 획일화에 맞서 처음 반기를 든 것이 1965년 앵커 브루잉을 인수한 프리츠 메이택이었고, 1978년 홈브루잉 합법화를 계기로 취미 양조가들의 열정에 불이 붙었다.

이들은 대기업이 버린 에일, 스타우트, IPA 같은 스타일을 되살리며 “다르게 만들겠다”는 선언을 맥주로 증명해 보였다. 이것이 크래프트 비어 운동의 시작이다.


한국 크래프트 비어의 역사와 궤적

한국크래프트맥주 양조장들
출처 : 사단법인 한국 수제맥주협회

한국 맥주의 역사는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통해 일본 상품이 무관세로 수입되면서, 삿포로 맥주가 한국 땅에 처음 발을 디뎠다.

이후 1933년, 대일본맥주가 영등포에 조선맥주 주식회사를 설립했고, 같은 해 기린맥주도 쇼와 기린맥주를 세웠다. 이 두 회사가 바로 현재의 하이트맥주와 오비맥주의 전신이다.

해방 이후에도 한국 맥주 시장은 오비와 하이트의 양강 체제가 수십 년간 이어졌다. 소비자의 선택지는 극히 제한적이었고, 대부분의 맥주는 비슷한 맛의 라거였다.

한국에서 수제맥주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2002년이다.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정부가 각종 규제를 완화하면서, 주세법에 소규모 맥주 제조 면허가 도입되었다. 당시에는 ‘하우스 맥주’라고 불렀으며, 양조한 곳에서만 직접 맥주를 팔 수 있는 형태였다.

새로운 맥주에 대한 호기심은 폭발적이었고 서울을 시작으로 지방까지 확산되어 2005년에는 115개의 소규모 양조장이 생겨났다.

이 시기를 흔히 ‘수제맥주 1세대’라고 부르는데, 대부분 독일식 맥주를 만들었다. 황금빛 필스너, 향긋한 바이젠, 어두운 둥켈. 이른바 ‘필바둥’이라 불리는 세 가지가 주류였다.

하지만 초기의 열기는 금방 식었다. 양조장 수는 2013년 58개까지 줄어들었다. 가장 큰 원인은 외부 유통이 불가능했던 규제다. 만든 곳에서만 팔 수 있으니 수익 구조에 한계가 있었고, 전문 양조사가 부족해 맥주 품질에도 일관성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변화는 2014년에 찾아왔다. 주세법이 다시 개정되면서 소규모 양조장의 외부 유통이 허용되었다. 이때부터 ‘수제맥주 2세대’가 등장한다.

해외에서 실력을 쌓고 돌아온 브루어, 혹은 외국인이 직접 운영하는 양조장도 등장했다. 이들은 ‘필바둥’을 넘어 미국식 페일 에일, IPA, 벨기에 맥주 등 다양한 스타일을 한국에 소개하기 시작했다.

주세법 개정과 편의점 수제맥주 시대

한국 수제맥주 역사에서 가장 큰 전환점은 2020년이다. 이 해, 맥주에 대한 주세 부과 기준이 가격 기반의 종가세에서 출고량 기반의 종량세로 바뀌었다.

기존 종가세 체계에서는 소규모 양조장이 불리했다. 대량 생산이 어려워 제조 원가가 높은데, 그 높은 원가에 비례해 세금도 높게 붙었기 때문이다.

반면 수입 맥주는 통관 시점의 낮은 가격을 기준으로 세금이 부과되어 상대적으로 유리했다. 이른바 ‘4캔 만원’ 프로모션이 수입 맥주에서만 가능했던 구조적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종량세로 전환되자 국산 수제맥주도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투자자들은 수제맥주 시장이 금광이 될 것이라 기대했고, 소규모 양조장들은 생산시설을 늘렸다. 편의점에서도 수제맥주 4캔 만원 행사가 시작되었다.

여기에 코로나 팬데믹이 기름을 부었다. 영업 제한으로 펍과 음식점이 문을 닫으면서 유흥용 시장이 위축된 대신, 편의점과 마트 중심의 가정용 시장이 폭발했다.

홈술·혼술 문화가 정착되면서, 편의점 냉장 코너를 가득 채운 수제맥주는 연일 화제가 되었다. 한국수제맥주협회에 따르면, 2013년 93억 원이었던 수제맥주 시장 규모는 2021년 1,520억 원까지 성장했다.

특히 2020년 세븐브로이가 편의점 CU, 대한제분과 손잡고 출시한 ‘곰표 밀맥주’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러자 치약, 구두약, 각종 식품 브랜드까지 앞다투어 맥주와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했다.

2014년 160억 원에 불과했던 수제맥주 시장은 2021년 약 2,000억 원을 기록하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미 이 성장의 이면에는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코로나 이후, 한국 크래프트 비어는 왜 쇠락했는가

[이미지 삽입 위치: 텅 빈 크래프트 비어 펍 내부]

2024년 기준, 한국 수제맥주 시장의 현실은 냉혹하다. 2024년 한국 맥주 시장은 매출 기준 약 3조 2천억 원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편의점 수제맥주는 약 550억 원, 나머지 소규모 수입사 및 크래프트 맥주가 650억 원 정도에 불과하다.

시장의 70%를 오비맥주와 하이트진로가 여전히 차지하고 있다.

업계 최초로 코스피에 상장했던 제주맥주는 사명을 ‘한울앤제주’로 변경하고 반도체 제조업과 폐기물 처리업을 사업 종목에 추가했다. 사실상 맥주를 포기한 것이다.

곰표 밀맥주로 한때 코스피 상장의 꿈을 꾸었던 세븐브로이는 2022년 320억 원이던 매출이 2024년 84억 원으로 떨어졌다. 영업손실 90억 원, 당기순손실 170억 원. 회사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다.

오비맥주는 2021년 론칭한 수제맥주 협업 브랜드 ‘코리아 브루어스 콜렉티브(KBC)’를 결국 철수했고, 롯데칠성도 수제맥주 전용 공장 운영을 중단했다. 편의점들도 더 이상 수제맥주 신제품을 출시하지 않고 있다.

왜 이렇게 빠르게 무너졌을까? 물론 외부 요인이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원재료비 상승, 위스키와 하이볼로 옮겨간 주류 트렌드, 전반적인 경기 침체와 소비 위축. 하지만 이런 거시적 요인만으로는 크래프트 비어만의 급격한 하락을 설명하기 어렵다.

수제맥주의 이름값을 지키지 못한 시장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수제맥주라는 이름이 일반 맥주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소비자에게 명확히 각인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편의점이 유통 채널의 중심이 되면서, ‘4캔 1만 1천~1만 2천 원’이라는 가격 정책에 맞춰 납품단가의 상한선이 정해졌다. 이 단가를 맞추려면 고품질의 개성 있는 맥주를 만들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양조장의 특색을 보여줄 수 있는 맥주 대신, 납품 단가를 맞출 수 있는 콜라보레이션 맥주만 넘쳐나게 되었다.

이것은 크래프트 비어의 정신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크래프트 비어의 본질은 양조자의 레시피와 철학이다. 아이디어가 마케팅 부서가 아닌 양조자에게서 나와야 한다고 강조한 바로 그 정신 말이다.

그런데 한국 편의점 수제맥주의 현실은 정반대였다. 맥주의 맛과 향보다 패키지 디자인과 브랜드 협업이 더 중요했고, 양조자의 철학보다 편의점의 납품 조건이 우선시되었다.

소규모 양조장들 사이에서는 편의점 4캔 만원 콜라보 맥주가 과연 수제맥주인지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결과적으로 소비자 입장에서는 수제맥주나 일반 맥주나 편의점에서 비슷한 가격에 비슷하게 살 수 있는 캔맥주일 뿐이었다.

‘수제’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그 이름이 보장하는 특별한 경험이나 품질의 차이를 체감하기 어려웠다. 편의점 맥주 선반에서 곰표 밀맥주와 카스가 나란히 놓여 있을 때, 소비자에게 둘의 차이는 패키지 디자인 정도였지 양조 철학의 차이가 아니었다.

sorry, we're closed이런 현상은 사실 미국에서도 이미 겪은 일이다. 크래프트 비어 붐이 일었을 때, 미국에선 대기업이 소규모 양조장인 것처럼 위장한 이른바 ‘스텔스 맥주(stealth beers)’가 등장했다고 한다.

마이크로 브루어리처럼 보이도록 포장했지만, 실상은 대기업이 만든 제품이거나 유행에 편승해 순전히 사업성만 보고 설립된 회사의 맥주였다. 이 스텔스 맥주들은 소비자의 신뢰를 갉아먹었고, 결국 ‘마이크로 브루잉’이라는 단어 자체가 의미를 잃는 데 일조했다.

한국의 편의점 수제맥주 시대에서도 이와 놀라울 만큼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수제맥주 면허도, 자체 양조 시설도 없이 OEM 위탁 생산으로 캐릭터만 입힌 콜라보 맥주가 편의점 냉장고를 가득 채웠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곰표, 말표 등의 맥주들이 수제맥주인지 대기업 맥주인지, 아니면 그저 마케팅 상품인지 구분할 방법이 없었다. ‘수제’라는 이름이 품질의 보증이 아니라, 편의점 선반 위의 마케팅 라벨로 전락한 순간이었다.

지금 수제맥주 업계의 풍경은 어지럽다. 한때 IPO를 추진하며 수천억 기업가치를 인정받던 양조회사들이 회생절차에 들어갔고, 20년 넘은 1세대 양조장마저 맥주 사업을 축소하고 하이볼 브랜드를 론칭하고 있다.

수제맥주 설비에서 하이볼 생산 설비로의 전환 비용이 낮다 보니, 너도나도 RTD 하이볼 시장으로 뛰어들고 있는 형국이다. 맥주가 안 되니 하이볼, 하이볼이 안 되면 막걸리로. 트렌드를 쫓는 발버둥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필연적인 과정일 수 있다. 사업성만 보고 수제맥주 시장에 뛰어들었던 이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은, 거품이 걷히는 과정이지 산업의 종말이 아니다.

미국도 1990년대 크래프트 비어 붐 이후 수백 개의 양조장이 문을 닫는 극심한 구조조정을 겪었지만, 그 속에서 살아남은 양조장들이 오늘날 미국 크래프트 비어의 토대가 되었다.

한국 수제맥주도 지금 그 성장통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트렌드가 아니라 맥주 자체에 진심인 양조장들, 편의점 납품가가 아니라 한 잔의 맥주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양조장들이 이 겨울을 버텨낼 것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한국에서도 크래프트 비어라는 말이 제대로 된 의미를 갖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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