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라보(Le Labo), 뉴욕의 작은 실험실 (향수 추천 Top 5, 브랜드 스토리, 철학)

르 라보(Le Labo)

르 라보 뉴욕 매장
출처 : 르 라보 공식 홈페이지

뉴욕 놀리타(Nolita)의 좁은 골목, 엘리자베스 스트리트 233번지.
2006년, 이곳에서 향수 산업의 관습을 뒤집는 작은 실험실이 문을 열었다.

르 라보(Le Labo)는 프랑스어로 ‘실험실’을 뜻한다.이 이름은 조향사의 연구실에서 일어나는 창작의 순간을 고객에게 그대로 전달하겠다는 선언이었다.

“향수의 미래는 장인 정신에 있다(The future of luxury lies in craftsmanship).”

전통적인 향수 산업이 대량 생산과 화려한 광고에 의존할 때, 르 라보는 정반대의 길을 선택했다.
장인 정신, 투명성, 그리고 느림의 미학. 이것이 르 라보가 불과 20년 만에 전 세계 니치 향수 시장을 석권한 비결이다.


르 라보의 탄생 – 창립자 에디 로시와 파브리스 페노

르라보 창업자
출처 : Lifeandtimes Youtube

르 라보의 시작은 두 프랑스인의 우정에서 비롯되었다. 에디 로시(Eddie Roschi)와 파브리스 페노(Fabrice Penot)는 로레알 산하 조르지오 아르마니 향수 부서에서 처음 만났다.

에디 로시는 스위스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후, 우연히 향료 회사 피르메니히(Firmenich)를 방문하면서 향수의 세계에 입문했다. 그는 작은 갈색 병에서 풋풋한 잔디밭 향이, 또 다른 병에서 따뜻한 핫초코 향이 퍼져나오는 것을 보고 깊이 매료되었다.

파브리스 페노는 아르마니에서 니치 브랜드 개발을 담당했고, 에디는 엠포리오 아르마니 브랜드를 맡았다. 이탈리아 출장길에 함께 비행기를 타고 택시를 공유하며 그들은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어느 날, 두 사람은 같은 질문을 던졌다.

“향수가 왜 이렇게 획일화되어야 하지?”

당시 향수 시장은 마케팅이 모든 것을 지배했다.유명인 광고, 화려한 패키지, 대량 생산된 제품들. 향수 본연의 가치인 장인 정신과 원재료의 품격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2005년, 두 사람은 아르마니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투자자도, 광고 예산도 없이 친구들에게서 소액을 모아 사업을 시작했다. 놀리타에 첫 매장을 열 때는 건축가를 고용할 돈이 없어 직접 인테리어 공사까지 했다고 한다.

르 라보 창립자들이 대형 화장품 회사 임원들에게 사업 계획을 발표했을 때, 그들은 “말도 안 된다”며 비웃었다고 한다. 하루에 향수 4병 판매 목표라니, 그것도 병당 200달러에? 임원들은 “그냥 이력서나 보내라, 일자리를 찾아주겠다”고 했다.

슬로우 퍼퓸(Slow Perfume)의 철학

르 라보 블렌딩

르 라보는 스스로를 ‘슬로우 퍼퓸리(Slow Perfumery)’라 부른다. 패스트 패션처럼 쏟아지는 신제품 대신, 시간을 들여 완성한 작품 하나에 집중하겠다는 의미다.

장 클로드 엘레나(Jean-Claude Ellena)는 “니치 향수는 광고나 시장 테스트 없이 제품 자체로 승부한다. 향수가 스스로 말하게 하고, 강렬한 정체성과 후각적 개성을 표현해야 한다.” 르 라보는 이 철학을 가장 충실하게 실현한 브랜드다.

르 라보의 모든 향수는 매장에서 직접 블렌딩된다. 대형 공장에서 미리 만들어진 제품을 진열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선택한 순간 조향사가 원액을 섞어 병에 담는다. 라벨에는 제조 날짜와 장소, 그리고 고객이 원하는 이름이나 메시지가 인쇄된다.

향수 비평가 루카 투린(Luca Turin)은 르 라보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르 라보는 너무 힙해서 아플 지경이다. 그들의 철학은 ‘적을수록 좋다’인데, 그것도 프랑스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소 날카로운 평이지만, 르 라보가 기존 향수 업계에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르 라보의 숫자, 넘버링의 의미 르 라보(Le Labo), 뉴욕의 작은 실험실 (향수 추천 Top 5, 브랜드 스토리, 철학) 1

상탈 33(Santal 33), 로즈 31(Rose 31), 어나더 13(Another 13)…
르 라보 향수 이름에는 항상 숫자가 붙는다.
이 숫자는 무엇을 의미할까?

답은 해당 향수를 만드는 데 사용된 원료의 개수다.
상탈 33은 33가지, 어나더 13은 13가지 원료로 조합되었다는 뜻이다.

이 네이밍 시스템은 르 라보의 철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화려한 마케팅 용어 대신 조향의 본질인 원료와 배합에 집중하겠다는 선언인 동시에 이 자체가 훌륭한 마케팅이 되었다.

가장 단순한 향수는 암브레트 9(Ambrette 9)으로 9가지 원료만 사용하고, 가장 복잡한 향수는 일랑 49(Ylang 49)로 49가지 원료가 들어간다.

상탈 33은 완성되기까지 무려 93번의 수정을 거쳤다고 한다.
르 라보의 숫자 뒤에는 그걸 뛰어넘는 수십 번의 시행착오가 숨어 있다.

시티 익스클루시브(City Exclusive) 컬렉션

르 라보 시티 익스클루시브

르 라보의 가장 독특한 컬렉션은 단연 시티 익스클루시브다. 전 세계 특정 도시에서만 구매할 수 있는 한정 향수 라인으로, 각 도시의 정체성과 분위기를 향으로 담아냈다.

바닐 44(Vanille 44)를 원한다면 파리로, 포이브르 23(Poivre 23)을 원한다면 런던으로 가야 한다. 가이악 10(Gaiac 10)은 오직 도쿄에서만, 시트롱 28(Citron 28)은 서울에서만 구매할 수 있다.

왜 이런 번거로운 시스템을 만들었을까? 파브리스 페노는 이렇게 설명했다.
“어떤 아름다운 것들은 쉽게 얻을 수 없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럭셔리다.”

하지만 매년 9월, 단 한 달 동안 예외가 열린다. 이 기간에는 전 세계 모든 르 라보 매장과 온라인에서 시티 익스클루시브 전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 8월에는 샘플(1.5ml)을 먼저 구매할 수 있어 미리 향을 테스트해볼 수 있다.

전 세계 시티 익스클루시브 전체 리스트 (2006-2025)

향수명 도시 출시연도 주요 노트
Aldehyde 44 달라스 2006 나르시스, 자스민, 튜베로즈
Tubéreuse 40 뉴욕 2006 튜베로즈, 시트러스, 우드
Vanille 44 파리 2007 바닐라, 인센스, 우드
Poivre 23 런던 2008 블랙 페퍼, 인센스
Gaiac 10 도쿄 2008 가이악 우드, 머스크
Musc 25 로스앤젤레스 2008 머스크, 알데하이드, 앰버
Baie Rose 26 시카고 2010 핑크 페퍼, 로즈, 머스크
Cuir 28 두바이 2013 레더, 스모크, 우드
Limette 37 샌프란시스코 2013 라임, 자스민, 우드
Benjoin 19 모스크바 2013 벤조인, 올리바넘, 앰버
Mousse de Chêne 30 암스테르담 2017 오크모스, 파촐리, 자두
Tabac 28 마이애미 2019 타바코, 럼, 시더우드
Bigarade 18 홍콩 2019 베르가못, 네롤리, 릴리
Citron 28 서울 2020 시트러스, 진저, 자스민
Cedrat 37 베를린 2021 세드라, 진저, 우드
Myrrhe 55 상하이 2023 미르, 앰버, 머스크
Coriandre 39 멕시코 시티 2024 라임, 고수잎, 플로럴
Osmanthus 19 교토 2025 오스만투스, 자스민, 머스크

르라보 시티 익스클루시브 구매 방법과 시기

시티 익스클루시브의 구매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 연중 :  해당 도시의 르 라보 매장에서만 구매 가능
  • 8월 1일 ~ 9월 30일: 샘플(1.5ml) 전 세계 매장 및 온라인 구매 가능
  • 9월 1일 ~ 9월 30일: 풀사이즈(50ml, 100ml, 500ml) 전 세계 매장 및 온라인 구매 가능
  • 리필: 한 번 구매한 시티 익스클루시브 병은 전 세계 르 라보 매장에서 20% 할인된 가격으로 리필 가능

가격은 모든 시티 익스클루시브가 동일하다: 50ml 약 40-50만원, 100ml 약 70-80만원 (2024년 기준 한국 공식 가격).

서울 시티 익스클루시브 시트롱 28(Citron 28): 2020년 출시된 서울 전용 향수다. 상큼한 레몬과 진저로 시작해 자스민의 부드러움을 거쳐 머스크와 시더의 깊은 베이스로 마무리된다. 서울의 역동성과 세련됨을 담아냈다.


르 라보는 현재 19종의 클래식 컬렉션과 18종의 시티 익스클루시브를 보유하고 있다.
그중 한국에서 특히 인기 있는 세 가지 향수를 소개한다.

상탈 33 (Santal 33)

르 라보 상탈33

르 라보를 세계적 브랜드로 만든 일등공신이다. 뉴욕 타임스가 “어디서나 맡을 수 있는 향수”라고 표현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상탈 33은 원래 캔들로 먼저 출시되었다. 그래머시 호텔 사장 이안 슈레거가 로비용으로 더 스모키한 버전을 주문했고, 투숙객들이 “이 향이 뭐냐”며 열광했다. 이후 룸 스프레이로 출시되었다가, 한 고객이 룸 스프레이를 향수처럼 사용하는 것을 발견한 후 정식 향수로 탄생했다고 한다.

호주산 샌달우드와 시더우드가 스모키한 모닥불을 연상시키고, 카다멈, 아이리스, 바이올렛이 스파이시한 깊이를 더한다. 가죽 향이 은은하게 맴도는 머스크 베이스가 관능적인 잔향을 남긴다.

어나더 13 (Another 13)

르 라보 어나더13

영국 패션 매거진 어나더(Another Magazine)와의 콜라보레이션으로 탄생한 향수다. 잡지 창립자 제퍼슨 핵(Jefferson Hack)이 직접 베이스 노트로 암브록스(Ambrox)를 선택했다.

실제로는 암브록산이나 앰버그리스보다는 암브레트 시드와 자스민, 모스가 부드러운 피부 향과 머스크 성분들이 피부 위에서 체온과 만나 ‘나만의 체취’처럼 발향된다.

르 라보 창립자들은 어나더 13을 “백지장처럼 순수하고, 캘리포니아 절벽 위 집처럼 날카로운 매력을 가진 향”이라고 설명했다.

13가지라는 적은 원료로 만들어졌지만, 뿌린 사람마다 다르게 표현되는 것이 특징으로 향수를 뿌렸다는 티가 나지 않는 ‘스킨 센트’의 대명사로 불린다.

로즈 31 (Rose 31)

르라보 로즈31

전통적으로 여성용으로 여겨지던 장미 향수에 대한 도전으로 만들어진 로즈 31은 센티폴리아 로즈를 중심으로 시더, 가이악 우드, 머스크, 그리고 독특하게도 커민이 블렌딩되었다.

커민은 중동 요리에 쓰이는 강렬한 향신료인데, 이것이 로즈에 거친 야성을 부여한다. 파브리스 페노는 “남성도 여성도 동등하게 매력적으로 느끼는 장미”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남녀 구분 없이 사랑받는 유니섹스 로즈의 교과서로 평가받는다.

르 라보의 독특한 파트너

르 라보 소울

르 라보 매장에 들어서면 일반 향수 매장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노출된 벽돌, 콘크리트 바닥, 원목 테이블, 그리고 흰 가운을 입은 스태프들. 마치 연구실이나 약국에 온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르 라보에서 향수 블렌딩을 맡는 직원을 ‘소울(Soul)’이라 부른다. 브랜드 철학을 전달하는 영혼이라는 의미다. 소울들은 고객에게 향수를 서둘러 권하지 않는다. 대신 고객이 편안히 앉아 테스터를 뿌리고, 시간을 두고 향을 음미하도록 공간을 제공한다.

파브리스 페노는 이렇게 말했다.
“공감과 침묵이 고객과의 연결에서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그들이 스스로를 표현할 공간을 준다. 판매는 그저 부산물일 뿐이다.”

향수를 선택하면 소울이 대형 유리 디스펜서에서 원액을 뽑아 병에 담는다. 그리고 고객 앞에서 라벨을 출력해 부착한다. 라벨에는 제조 날짜, 장소, 그리고 고객이 원하는 문구가 들어간다.


르 라보가 에스티 로더에 인수된 이후

2014년, 에스티 로더 컴퍼니즈(Estée Lauder Companies)가 르 라보를 인수했다.
인수 금액은 약 6천만 달러(약 800억 원)로 추정된다.

많은 팬들이 우려했다. 대기업에 인수되면 르 라보의 정체성이 훼손되지 않을까? 하지만 인수 조건에는 특별한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다. 창작에 관한 완전한 자율권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에디 로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여전히 제품 개발을 전적으로 책임진다. 외부에 테스트하거나 의견을 구하지 않는다. 창작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여야 한다. 특히 향수에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물으면 컨셉이 희석되고, 결국 대중 제품이 된다.”

에스티 로더 경영진이 연간 5종의 신제품 출시를 요청했을 때, 창립자들은 단호히 거절했다. 르 라보는 여전히 1년에 1-2종만 출시하며, 느림의 철학을 고수하고 있다.

인수 이후 르 라보는 아시아 시장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매장은 40개국 이상으로 확대되었지만, 광고를 하지 않고 입소문으로만 성장한다는 원칙은 여전하다. B Corp 인증을 받아 지속가능성에 대한 헌신도 입증했다.

르 라보는 셀럽에게 무료 제품을 제공하지 않는다. 유명인도 일반 고객과 동일하게 돈을 내고 구매해야 한다. 그럼에도 비욘세, 테일러 스위프트, 저스틴 비버 등이 르 라보를 애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욘세의 앨범 ‘레모네이드’ 뮤직비디오에는 상탈 26 캔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뉴욕 놀리타의 작은 실험실에서 시작된 르 라보의 혁명이 전 세계 향수 산업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르 라보가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메세지는 지금의 성공을 이룬 르 라보가 여전히 뉴욕의 작은 실험실로 느껴지게 하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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