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담는 여행자

누구나 한번 쯤 들어봤을 질문이 있다.

커서 뭐가 되고 싶냐는 질문, 장래희망과 꿈에 대한 것.

대부분 그 질문은 사실 직업을 물었다. 어릴 때는 과학자라고 답했다.

누가 심어준 답인지, 직접 원한 건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스무 살이 되어도 달라진 건 없었다.

직업의 이름을 나열해놓고 들여다봐도 갖고 싶다는 감각이 오지 않았다.

성적에 맞춰 공과대학을 선택했다. 먹고 살기엔 충분할 거라는 계산이었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 무렵 꿈의 형태를 다시 생각해봤다.

직업이 아니라, 미래의 나는 어떤 삶을 보내고 어떤 장면에서 즐거움을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가.

그렇게 좁혀가다 하나의 장면이 남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음식과 술 한 잔을 대접하는 것.

소박하고 구체적이면서 퍽 마음에 와 닿았다.

그 장면을 떠올리고 나니 확신이 생겼다.

팍팍하게만 느껴지던 하루가 즐길거리로 가득하다는 걸 알게 됐다.

음식에 마음껏 애정을 쏟았다.

맛있는 걸 먹고, 직접 만들고, 나누는 것. 음식과 요리를 따라가다 술에 닿았다.

술은 변수가 많았다. 같은 재료도 온도와 시기, 손과 작은 디테일에 따라 전혀 다른 술이 나왔다.

그 미묘한 차이에 흥미가 갔다.

작은 변수들이 만들어내는 다양성과 문화의 깊이가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한 평생을 다 애정을 쏟아도 모자람이 없겠다는 확신이 왔다.

발효는 시간을 담는 일이다. 지금 이 계절의 온도, 이 재료가 가진 상태, 그것들이 술 안에 그대로 남는다.

술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계절이 눈에 들어왔다.

이 시기에만 나는 과일, 이 지역에서만 구할 수 있는 재료들.

제철이라는 개념이 감각으로 들어와서 내 옆에 자리잡았다.

전국 각지, 세계 각지의 재료들을 술로 담고 싶었다.

이 지역에서만 나는 것, 이 시기에만 구할 수 있는 것. 그걸 쫓다 보니 발길이 움직였다.

시기에 맞는 재료를 찾아, 그 술을 만드는 양조장을 찾아 여행하는 일이 생겼다.

어떤 양조장은 산속에 있었고, 어떤 곳은 바닷가 근처였다.

그 공간의 공기와 물이 술에 스민다는 걸 그곳에 가야 알 수 있었다.

여행이 목적이 아니라, 술을 따라가다 보니 여행이 되어 있었다.

술은 향의 음료다. 입보다 코가 먼저 닿는다.

술에 관심을 갖다 보니 향을 공부하게 됐다.

눈을 감고 코에만 집중하면 평소엔 스치던 것들이 선명해졌다.

큰 재능은 없었지만 시기와 장면에 맞는 향을 만드는 것에도 재미가 붙었다. 그걸 찾는 일이 좋았다.

그렇게 술을 중심으로 내 취향이 확장되어 갔다.

봄 딸기엔 맑고 싱그러운 향이 있다.

여름 복숭아는 한 입 베어 물면 과즙이 손목까지 흘러내린다.

가을엔 햇사과의 단단하고 아삭한 달콤함이, 겨울엔 유자 껍질을 벗기는 순간 퍼지는 그 냄새가.

이 시간들을 담아두고 나누고 싶다. 이 블로그의 탄생한 배경이다.

존 키팅은 시와 낭만, 아름다움이 삶을 윤택하게 한다고 말했다.

내게는 따뜻한 저녁, 술과 음식,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가 그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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