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남단 끝, 보성을 거쳐야만 닿을 수 있는 고흥반도는 오랫동안 ‘멀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지만, 그 덕에 청정함을 오롯이 간직했다.
고흥은 산과 바다가 번갈아 펼쳐지는 지형 덕분에 육지와 바다 양쪽의 풍물이 두루 쌓였다.
고흥군은 이 풍물을 8품·9미로 정리해 지역 브랜드로 육성하고 있다. 지리적표시제에 등록된 농수산물 여덟 가지가 8품이고, 그것을 재료로 식탁에 올린 아홉 가지 대표 음식이 9미다.
이 글에서는 8품에서 핵심 특산물을 골라 역사와 이야기를 풀고, 9미에서 꼭 맛봐야 할 향토 음식을 소개한다. 마지막에는 8품·9미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표도 정리했다.
목차
고흥 특산물
유자

고흥에서 유자나무는 오래전부터 ‘대학나무’라 불렸다. 나무 한 그루에서 거둔 유자만으로 자식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거기서 나왔다.
이 고장이 유자의 본향이 된 데는 지형이 결정적이었다. 연평균 기온 13~15℃, 최저 기온이 영하 9℃ 아래로 좀처럼 내려가지 않는 온난한 기후, 연간 2,400시간에 이르는 풍부한 일조량, 그리고 남해 바다에서 불어오는 적당한 해풍이 맞아떨어졌다.
현재 고흥의 유자 생산량은 전국의 약 35~50%를 차지한다. 주산지는 풍양면과 두원면이다. 수확 철인 11월이 되면 이 고장 전체가 유자 향으로 물드는데, 풍양면 한동리 유자공원에 서 있으면 바람이 불 때마다 향기가 온몸을 뒤덮는다.
제철 & 고르는 법
수확: 10월 하순~11월 하순. 껍질이 고르게 노랗고 표면에 얽음(울퉁불퉁함)이 많을수록 향이 진하다.
가공품: 유자청·유자차·유자코쇼(청고추 섞은 페이스트)·유자소금·유자막걸리까지 다양하다.
고흥유자축제: 매년 11월 초 풍양면 한동리 유자밭 일원
석류

유자가 11월의 고흥을 노랗게 물들인다면, 10월의 이 고장을 붉게 수놓는 것은 석류다. 고흥 석류는 고흥 8품 가운데 2품으로, 전남 대표 석류 생산지다.
석류는 껍질이 억세어 서해와 달리 거친 해풍을 맞는 남해안에서 잘 자란다. 이 고장의 청정한 일조량과 해풍이 과즙을 농밀하게 만들고, 특유의 새콤달콤한 맛을 끌어올린다.
생과로 먹기보다 즙·원액·발효액으로 가공되는 경우가 많다. 전통 항아리에 올리고당과 함께 석 달 이상 숙성시킨 석류발효액은 이 고장 특유의 가공 방식으로, 지역 농가에서 직접 생산한다.
제철 & 보관 팁
수확: 9월 하순~10월. 껍질이 완전히 붉고 묵직한 것이 알이 꽉 찬 것이다.
보관: 껍질째 서늘한 곳에 두면 오래가며, 알만 발라내면 냉동 보관도 가능하다.
김

전국에서 유통되는 김밥용 물김의 약 80%가 고흥에서 생산될 정도로 고흥은 김이 많이 나는 지역이다.
득량만과 고흥만은 남해의 깨끗한 조류가 드나들고 수온이 안정적이어서 김 양식에 최적의 환경을 갖춘다. 금산면·도화면·도덕면·풍양면 일대가 주요 양식지다.
고흥 김은 고흥 8품 3품으로 지리적표시제에 등록돼 있다. 미역과 다시마도 각각 4품·5품으로 지정되어 있어, 이 고장의 해조류 산업 전체가 공인된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굴

도양읍 오마리 일대에는 큰 규모의 굴 양식장이 있다. 이곳의 굴은 물속에 줄을 매달아 굴을 키우는 ‘수하식’으로 양식해 살이 통통하고 육질이 부드럽다.
고흥 굴이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진짜 이유는 크기다. 남해 청정 해역에서 자란 석화는 서해 굴과 비교해 훨씬 크고 야성적인 풍미가 강하다. 그 덕에 이 고장에서는 굴 젓갈도 독특하게 발달했는데, 바로 진석화젓이다.
굴이 자라는 겨울철이 되면 어민들이 큼직한 석화를 직접 채취해 소금에 삭힌다. 발효가 진행될수록 굴은 형체를 거의 잃고 즙이 검게 흥건해지는데, 이것이 진석화젓이다. 세간에는 ‘굴소스 직전 단계’라는 말도 있다.
2. 고흥 지역음식
진석화젓·피굴

앞서 소개한 고흥 굴이 밥상에 오르는 가장 고흥다운 방식이 진석화젓이다. 서해안의 어리굴젓이 알이 잘고 새초롬한 새콤함으로 승부한다면, 진석화젓은 발효가 만들어내는 검고 진한 풍미로 승부한다.
젓갈 한 입에 밥 세 숟가락은 너끈히 들어간다는 말이 있을 만큼 강렬하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식문화 자료에는 진석화젓을 “엔초비 대신 파스타에 넣거나 볶음요리에 굴소스 대신 써도 어울린다”고 소개했을 정도다. 고흥 토박이들은 고기를 구울 때 쌈장 대신 진석화젓을 곁들이기도 한다.
진석화젓과 함께 이 고장 굴 음식의 쌍벽으로 꼽히는 것이 피굴이다. 큼직한 석화를 솥에 넣고 뭉근히 달여 뽀얀 국물을 내는 음식으로, 끓이는 동안 굴에서 빠져나온 진액이 국물에 녹아들어 깊고 구수한 맛을 낸다.
진석화젓은 겨울 수확 때 담가 봄까지 먹고, 피굴은 겨울 굴이 통통할 때 가장 맛이 좋다. 둘 다 ‘제철에 현지에서’만 제대로 만날 수 있는 음식이다.
나로도 삼치

나로도항 일대는 고흥군이 공식으로 ‘삼치거리’로 조성한 구역이다. 고흥 9미에도 삼치회·구이가 5미로 선정돼 있을 만큼, 이 고장에서 삼치는 상징적인 생선이다. 나로도·거문도 근해에서 가을철 잡히는 삼치는 지방이 오르고 육질이 단단해 선어 상태에서도 회로 즐길 수 있다.
현지인들은 삼치회를 고흥 김에 싸서 특제 간장에 찍어 먹는 방식을 으뜸으로 친다. 삼치의 부드럽고 기름진 살과 바삭한 김이 만나면 따로 조미가 필요 없다. 최근에는 삼치탕수육, 삼치고추장조림, 유자삼치구이 같은 새로운 메뉴도 속속 개발돼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삼치는 봄에 산란하기 때문에 금어기가 있고, 맛이 오르는 때는 가을부터 초봄까지다. 나로도를 방문할 예정이라면 9~11월이 가장 좋은 시기다.
바지락 회무침·짓갱

고흥 바지락은 고흥 9미 8미로 선정된 향토 식재료다. 득량만과 여자만 사이 갯벌에서 자란 이 고장의 바지락은 살이 통통하고 단맛이 강해 국물 맛이 다른 곳과 다르다.
바지락을 먹는 방법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초무침이다. 살짝 데친 바지락 살에 초고추장, 쪽파, 참깨를 넣고 손으로 조물조물 버무리면 바지락 회무침이 된다. 살의 쫄깃함과 새콤한 소스가 어우러져 막걸리 안주로도, 여름 별미 반찬으로도 제격이다.
나머지 하나가 짓갱이다. ‘짓갱’은 지짐이가 전라도 방언으로 굳어진 말로, 부침개처럼 바짝 끓이는 것이 아니라 된장·고추장에 채소와 바지락을 넣고 자박하게 졸이듯 끓이는 방식이다. 전라도식 조개 된장찌개와 비슷하지만, 국물 양을 줄여 재료에서 우러나는 진국을 그대로 먹는다.
고흥 현지 밥상에서 짓갱은 독립된 메뉴로 나오기보다 백반 한 상의 뚝배기 찌개 자리를 차지한다. 된장이 바지락의 날카로운 짠맛을 잡고, 바지락 국물은 된장의 구수함을 끌어올리는 짝이다.
장어탕·구이

고흥 9미 가운데 1미 자리를 차지한 음식이 장어탕·구이다. 특히 녹동항 일원에는 ‘장어거리’가 조성돼 있으며, 전문점 13곳이 나란히 이어진다. 전국 각지에서 고흥을 찾는 여행자들이 목적지처럼 들르는 곳이다.
이 고장에서 장어라 하면 붕장어가 기본이다. 청정 남해 해역에서 자란 고흥 붕장어는 살이 두툼하고 기름기가 적당해 탕으로 끓이면 국물이 깊고 구이로 올리면 껍질이 바삭하게 익는다.
여름에는 갯장어도 빠질 수 없다. 잔가시째 어슷하게 칼집을 내어 썬 갯장어회는 씹을수록 고소하고, 뜨거운 육수에 살짝 담갔다 건지는 갯장어 샤브샤브는 꽃처럼 퍼지는 모양이 볼거리까지 된다.
장어탕은 통장어를 토막 내어 무·고추·마늘과 함께 끓인 뒤 들깻가루를 풀어 마무리하는 방식이 고흥 현지 스타일이다. 들깨 향이 장어 특유의 비린내를 잡고, 진한 국물이 몸을 데운다. 탕·구이·회를 한 상에 받아 각각 맛을 비교해 먹는 것이 녹동 장어거리의 정석이다.
3. 고흥 8품·9미 한눈에 보기 & 고흥 제철 캘린더
고흥군이 공식으로 선정한 8품은 지리적표시제에 등록된 대표 농수산물이고, 9미는 그 재료를 활용해 현지에서 즐기는 대표 음식이다.
고흥 8품
| 품번 | 특산물 | 제철 | 대표 특징 |
|---|---|---|---|
| 1품 | 유자 | 10월 하순~11월 하순 | 전국 최대 주산지, 유자청·유자차·유자코쇼 |
| 2품 | 석류 | 9월 하순~10월 | 청정 해풍 재배, 석류즙·발효액 |
| 3품 | 김 | 11월~3월 | 전국 김밥용 김 80% 생산, 득량만·고흥만 청정 해역 |
| 4품 | 미역 | 3월~5월 (봄미역) | 전국 생산량 40%, 부드러운 식감 |
| 5품 | 다시마 | 5월~7월 | 건다시마 연 500여 톤 위판, 국물용 선호도 높음 |
| 6품 | 굴 | 11월~3월 | 수하식 양식, 진석화젓·피굴의 원료 |
| 7품 | 마늘 | 5월~6월 수확 | 황 성분 풍부한 토양, 알리신 함량 높음 |
| 8품 | 유자골한우 | 연중 | HACCP 인증 도축, 유자골 전용 사료 급여 |
고흥 9미
| 미번 | 음식 | 제철 | 포인트 |
|---|---|---|---|
| 1미 | 장어탕·구이 | 여름~초가을 | 청정 남해 붕장어, 녹동 장어거리 집중 |
| 2미 | 서대회무침·조림 | 봄 (나로도 해역) | 막걸리 식초 회무침, 감자 고추장 조림이 전통 방식 |
| 3미 | 유자술 | 연중 (11월 유자 수확 후 담금) | 유자+한약재 발효 전통 약술, 여수세계박람회 건배주 |
| 4미 | 매생이국 | 12월~2월 | 거금도 월포 매생이 유명, 매생이떡국·매생이호떡으로도 |
| 5미 | 삼치회·구이 | 9월~11월 | 나로도 삼치거리, 고흥 김에 싸 먹는 방식이 현지식 |
| 6미 | 전어회·구이 | 9월~10월 | 뼈째 썬 ‘뼈꼬시’로 즐기면 씹을수록 고소 |
| 7미 | 모듬생선 숯불구이 | 연중 | 고흥 전통시장 명물, 바삭하고 촉촉한 숯불 향이 특징 |
| 8미 | 바지락회무침·짓갱 | 봄·가을 | 짓갱은 바지락을 된장·채소와 끓인 고흥식 찌개 |
| 9미 | 한우구이 | 연중 | 유자골한우 브랜드, 부드러운 육질과 깊은 풍미 |
제철 캘린더
| 먹거리 | 제철 시기 | 대표 맛 | 추천 즐기는 법 |
|---|---|---|---|
| 매생이국 | 12월~2월 | 부드럽고 구수한 바다 향 | 굴 넣은 매생이국, 매생이떡국 |
| 굴·진석화젓·피굴 | 11월~3월 | 진하고 짭조름한 발효향 | 밥반찬, 고기 곁들임 |
| 김 | 11월~3월 | 고소하고 바삭 | 삼치회 싸먹기, 김밥 |
| 유자 | 10월 하순~11월 하순 | 상큼하고 향긋 | 유자청·유자차·유자삼치구이 |
| 석류 | 9월 하순~10월 | 새콤달콤하고 진한 과즙 | 생과, 석류즙, 발효액 |
| 삼치회·구이 | 9월~11월 | 기름지고 부드러운 선어 맛 | 삼치회, 삼치탕수육, 유자삼치구이 |
| 전어 | 9월~10월 | 씹을수록 고소 | 뼈꼬시(뼈째 회), 전어구이 |
| 마늘 | 5월~6월 (수확) | 알싸하고 강한 향 | 생마늘, 흑마늘, 마늘즙 |
| 봄 미역·서대 | 3월~5월 | 부드럽고 싱싱 | 미역국, 서대회무침·조림 |
| 낙지 | 연중 (봄·가을 최고) | 쫄깃하고 바다 향 진함 | 낙지탕탕이, 연포탕, 철판볶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