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왕도라는 이름과 경주라는 유명세에 비하면 경주의 음식하면 특별하게 딱 뇌리에 꽂히는 음식이 많지 않다. 산과 바다, 강과 너른 평야를 모두 품은 덕에 경주는 사실 다양한 재료가 자란다.
그렇게 자란 재료들은 다시 사람의 손에서 한 그릇의 음식으로 태어났다. 지금부터 경주를 대표하는 특산물과, 그 특산물이 빚어낸 지역 음식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목차
경주 특산물
경주쌀

경주쌀이 유독 차지고 윤기가 도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낙동강 하류를 낀 비옥한 평야, 풍부한 일조량과 큰 일교차가 낟알에 단단한 찰기를 만들어준다.
예로부터 신라 왕실에 진상되었다는 이야기가 이 고장에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다. 확인할 문헌은 마땅치 않지만, 그만큼 이 고장 쌀에 대한 자부심이 깊다는 뜻으로 읽힌다.
경주시는 농협 공동 브랜드로 이사금이라는 공동 브랜드를 만들었다. 신라 3대 왕의 칭호였던 이사금처럼, 명실공히 이 고장을 대표하는 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품종은 단일 품종 삼광미를 주로 사용한다.
밥을 지으면 윤기가 자르르 돌고, 식어도 쉬이 맛이 떨어지지 않는다.
경주천년한우

경주에서 나고 자란 소를 아무렇게나 경주 한우라 부르는 게 아니다. 이 고장 축협은 번식부터 사육까지 전 과정을 통합 관리하는 브랜드, 경주천년한우를 따로 키워왔다.
신라 천년의 전통을 고기 맛에도 담겠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값싼 수입육과 경쟁해야 했던 시절, 품질로 승부하겠다는 결심이 이 이름 안에 담겨 있다.
그 결심은 숫자로도 증명됐다. 2007년 전국 최초로 한우 사육 단계부터 HACCP 인증을 받았고, 2025년에는 축산물 브랜드 경진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경주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한우 사육 규모를 자랑하는 고장이다. 연간 2천만 명이 드나드는 이곳에서, 한우는 유적 답사 뒤 든든한 한 끼를 책임지는 존재다.
경주축협이 운영하는 한우 판매장에서 구이용 정육을 살 수 있고, 관광특구 안팎의 한우 전문 식당에서도 어렵지 않게 맛볼 수 있다. 뒤에서 소개할 한우물회 역시 이 한우로 만든다.
참가자미(용가자미)

포항과 경주, 울산 등지에는 참가자미 횟집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 참가자미는 속초, 강릉 등 북부 동해안 지역에서 잡히는 배가 노란 참가자미와는 달리 배가 자색을 띄는 품종으로 표준명은 ‘용가자미’다.
감포 사람들을 포함한 경북 지역에서는 예로부터 용가자미가 많이 잡혀 시장에서는 그냥 참가자미라 불러왔다.
제철은 봄, 11월에서 5월 사이다. 이 시기 용가자미는 살이 오르고 식감이 좋아 회로도 물회로도 그만이고 알을 밴 알배기는 조림이나 구이, 찌개로도 많이 먹는다.
체리

6월, 경주에 딱 한 달 남짓 허락되는 과일이 있다. 100년 가까운 재배 역사를 지닌 경주체리다.
1936년 건천읍 화천리 일대에 처음 나무가 심겼고, 이후 한 농부가 그 나무를 사들여 본격적으로 키우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전국 체리 생산량의 40퍼센트 이상을 경주에서 책임진다. 5월 말부터 6월 중순까지, 체리는 수확기가 유독 짧다.
과육이 단단하고 과즙이 넉넉하며, 수입 체리보다 새콤한 맛이 도드라진다는 평이 많다. 최근에는 체리를 넣은 잼이나 스파클링, 와인 같은 가공품도 하나둘 늘고 있다.
신경주역 인근에도 체리 농장이 많아, KTX로 와서 당일치기로 체리 따기 체험을 즐기는 이들도 있다. 6월에 경주를 찾는다면, 유적 답사 사이사이 잠시 들러볼 만하다.
경주 지역음식
황남빵

1938년, 스물한 살 청년 최영화가 팥으로 새로운 먹거리를 궁리했다. 대대로 팥떡과 팥과자를 만들어 먹던 집안 내림이었다.
이듬해 그는 가게를 본가가 있는 황남(皇南)동으로 옮겼고, 동네 이름을 딴 황남빵이 세상에 나왔다. 밀가루 반죽에 팥소를 넣는 방식은 당시로선 서양식과 한국식이 섞인 새로운 발상이었다.
일제강점기 말 물자난으로 잠시 문을 닫았다가, 1956년 다시 문을 열었다. 이후 창업주의 두 아들과 수제자에게로 갈라져, 지금은 황남빵·최영화빵·이상복명과 세 갈래로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어느 쪽이 더 원조에 가까운지를 두고 이야기가 분분하지만, 셋 모두 창업주에게서 뻗어 나온 뿌리라는 사실만은 다르지 않다. 얇은 피에 팥소를 꽉 채운 기본기는 세 곳 모두 여전히 지키고 있다.
신라 빗살무늬 토기를 닮은 무늬가 겉면에 새겨져 있어 보는 재미도 있다. 갓 나왔을 때는 겉이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데, 식으면 그 나름대로 쫀득해져 냉동실에 두었다 차게 먹는 이들도 많다. 2025년에는 APEC 정상회의 공식 디저트로도 이름을 올렸다. 여든 해 넘게 한 가지 팥빵만 고집해온 뚝심이 만들어낸 결과다.
한우물회

앞서 소개한 경주천년한우가 이 고장에서는 이색적인 방식으로도 밥상에 오른다. 바로 한우물회다.
원래 물회란 해산물을 잘게 썰어 찬 육수에 말아 먹는, 동해안 지역의 여름 별미다. 그런데 경주에서는 생선 대신 잘게 썬 한우 육회를 띄운다.
이 낯선 조합을 처음 낸 곳은 울산에서 시작해 4대째 이어온 노포, 함양집이다. 원래는 육회비빔밥으로 이름을 알렸는데, 경주 분점에서 2010년대 들어 한우물회를 새로 개발하며 오히려 이쪽이 대표 메뉴가 됐다.
살얼음이 살짝 언 새콤달콤한 육수에 채 썬 배와 오이를 깔고, 그 위에 한우 육회를 올린다. 숟가락을 뜰 때마다 사그락거리는 얼음 소리가 나고, 고기의 감칠맛과 새콤한 국물이 어우러져 비린내 없이 깔끔하다.
보문관광단지 인근에 함양집을 비롯해 한우물회를 내는 집이 여럿 있다. 여름 한 그릇으로 든든하게 즐기려면, 함께 나오는 소면이나 밥을 국물에 마는 타이밍을 눈여겨볼 만하다.
경주 쌈밥

대릉원 담장을 끼고 걷다 보면 어느새 쌈밥집들이 늘어선 골목이 나온다. 신라 왕릉 사이를 거닐던 발걸음이 자연스레 이 골목으로 이어지며 자리 잡은 먹거리 거리다.
쌈밥 정식을 주문하면 상 위가 금세 푸짐해진다. 경주 쌀로 고슬하게 잘 지어진 밥에 집된장으로 끓인 찌개와 석쇠에 구운 불고기, 갓 씻어낸 여러 쌈채소가 한 상 가득 오른다.
가게마다 조금씩 다른데, 석쇠구이쌈밥이나 소불고기쌈밥처럼 굽는 방식과 고기 종류로 개성을 낸다. 강된장에 고기를 싸 먹다 보면 어느새 밥 한 공기가 훌쩍 비워진다.
대릉원 정문 근처 계림로 일대에 밀집해 있어, 고분 답사를 마친 뒤 자연스레 들르기 좋다. 단체 손님을 받는 곳이 많아 가족 여행객에게도 부담이 적다.
짬뽕(돼지낙지불고기)

경주에서 짬뽕은 중국집 짬뽕만 있는 게 아니다, 주로 기사식당 등지에서 돼지불고기와 낙지를 한 냄비에 섞어 볶는 음식을 경주에서는 그냥 짬뽕이라 부른다.
경주 배동의 한 기사식당에서 오래전부터 내던 메뉴였는데, 방송을 타며 널리 알려졌다.
돼지고기와 낙지를 빨간 양념장과 함께 파와 양파를 함께 넣고 끓이다 보면 채소에서 서서히 육수가 배어 나와, 시간이 지날수록 국물이 진해지고 감칠맛이 올라온다.
돼지고기와 낙지를 큼직하게 쌈에 싸 먹어도 좋고, 어느 정도 졸아든 뒤 밥을 볶아 먹어도 좋다. 상추와 깻잎 같은 쌈채소가 넉넉히 함께 나온다.
경주시 배리1길의 남정 부일 기사식당이 대표적이다. 화요일은 정기 휴무이며, 이른 오후에는 짬뽕 단일 메뉴만 가능한 경우도 있어 미리 확인하고 가는 편이 좋다.
교리김밥

1960년대, 경주 교촌마을 한켠의 작은 구멍가게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시절 요정에서 일하던 이들이 간단히 허기를 달래려 즐겨 찾던 김밥이었다고 전해진다. 입소문이 하나둘 퍼지며 어느새 전국구 명물이 됐다. 지금은 교촌한옥마을을 떠나 오릉 옆으로 자리를 옮겨 영업 중이다.
이 김밥의 정체성은 계란지단에 있다. 요즘에는 타 지역에도 계란지단이 많이 들어간 김밥이 꽤 흔하고 인기 있지만 밥보다 지단이 많다 싶을 정도로 두껍게 채워 넣어, 폭신하고 담백한 식감이 도드라지는 게 특징이다.
삼릉 손칼국수

경주 남산 자락, 신라 왕릉 세 기가 나란히 놓인 삼릉숲 근처에는 칼국수집들이 모인 마을이 있다. 이 일대에서 우리밀을 재배하던 것이 계기가 되어 하나둘 생겨난 가게들이라 전해진다.
삼릉 칼국수집들의 특징이라면 우리밀을 사용한 칼국수 면과 가게마다 저마다 다른 육수를 쓰지만, 멸치와 새우, 다시마와 대파로 우려낸 국물에 들깻가루를 더해 뽀얗게 나오는 방식은 대체로 비슷하다. 그 덕에 국물이 살짝 걸쭉하고 고소한 맛이 도드라진다.
삼릉숲 산책 뒤 들르기 좋은 위치라, 칼국수에 해물파전이나 도토리묵을 곁들이는 이들이 많다. 순하고 구수한 맛이라 남녀노소 무난하게 즐길 수 있다.
팔우정 해장국

황오동 팔우정 삼거리, 정자 이름을 딴 이 골목은 광복 전후로 하나둘 해장국집이 들어서며 형성됐다. 한때는 서른 곳 가까이 성업하며,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에도 밤새 문을 여는 몇 안 되는 곳이었다.
이 고장 해장국은 여느 지역과 다르다. 콩나물 국물에 메밀묵과 신김치를 넣고, 해초인 모자반을 고명으로 올려 토렴해 내는 독특한 해장국이다.
메밀묵과 해장국이라니 낯설게 들리지만, 씹으면 부드럽게 뭉개지는 묵이 국물과 의외로 잘 어울린다.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해서, 얼큰한 해장국을 기대했다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질 맛이면서도 슴슴하고 익숙하지 않아 호불호도 많이 갈린다.
다만 최근 몇 년 새 쪽샘 유적지 정비 사업으로 골목의 많은 가게가 자리를 옮기거나 문을 닫았다. 한때 전성기를 누리던 이 거리는 지금은 아주 적은 수의 가게만 남아 명맥을 잇고 있어, 찾아가기 전 영업 여부를 확인해보는 편이 좋다.
경주 제철 음식 캘린더
| 먹거리 | 제철 시기 | 대표 맛 | 추천 즐기는 법 |
|---|---|---|---|
| 경주쌀 | 가을 수확(10~11월) | 찰지고 고소함 | 갓 지은 밥, 선물용 정미 |
| 경주천년한우 | 사계절 | 부드럽고 진한 육향 | 구이, 불고기, 물회 |
| 참가자미(용가자미) | 봄(3~4월) | 쫄깃하며 담백 | 회, 물회, 횟밥 |
| 경주체리 | 5월 말~6월 중순 | 새콤달콤 | 생과, 잼, 체리 따기 체험 |
| 황남빵 | 사계절 | 진한 팥소, 은은한 단맛 | 갓 나온 것, 우유와 함께 |
| 교리김밥 | 사계절 | 담백하고 폭신한 계란지단 | 포장 후 피크닉 |
| 경주 쌈밥 | 사계절 | 구수한 집된장, 다양한 쌈 | 대릉원 산책 후 한 끼 |
| 한우물회 | 여름 | 새콤달콤, 시원함 | 소면·밥 말아먹기 |
| 삼릉 손칼국수 | 사계절 | 걸쭉하고 고소함 | 해물파전 곁들이기 |
| 짬뽕불고기 | 사계절 | 매콤짭짤, 깊은 감칠맛 | 쌈으로, 볶음밥으로 |
| 팔우정 해장국 | 사계절(해장에 특히) | 담백하고 시원한 국물 | 이른 아침 방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