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에는 이름난 향토주가 전하지 않는다. 진도의 홍주나 해남의 진양주 같은 뚜렷한 계보가 남아 있지 않다. 대신 술이 오갔던 길의 흔적이 있다. 포구와 사라진 주막의 기억이다.
영암군 군서면 구림마을은 백제의 학자 왕인(王仁)이 태어난 곳이라는 설이 전해지는 마을이다.
그가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바다를 건넜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시기에 일본에 술 빚는 법을 전한 인물로 알려진 인번(仁番仁番), 일명 수수보리와 함께 영암 상대포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 갔다고 한다.
또 하나, 덕진 포구에는 덕진여사가 운영했다는 주막의 설화가 전한다. 덕진여사는 통일신라 시대 영암천 인근에서 주막을 운영하며 모은 사재로 행인들을 위해 덕진다리를 놓아준 전설 속 인물이다.
주막을 복원하자는 논의가 지역에서 여러 차례 나왔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현대에 와서 영암의 술하면 뭐가 떠오를까? 영암은 무화과의 고장이다. 전국 생산량의 절반 이상이 이 작은 군에서 나온다.
9월이면 삼호읍 들판이 검붉게 물들고, 하루만 지나도 무르는 이 과일을 두고 영암 사람들은 오래 고민해왔다. 잼과 즙과 양갱을 만들었고, 마침내 술을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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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호 주조장(도갓집)
1945년, 삼호읍 용앙리에 술도가가 문을 열었다. 광복과 같은 해에 시작해 지금까지 80년, 3대를 이어오고 있다.
브랜드 이름은 도갓집. 술을 빚는 ‘도가’에 ‘집’을 붙였다.
이 양조장의 결정적인 선택은 무화과였다. 삼호읍은 영암 무화과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발밑에서 나는 과일로 술을 빚는 건 으레 자연스러우면서 탁월한 마케팅으로도 작용한다. 2023년부터는 영암군과 손잡고 지역 대표 전통주를 함께 내놓고 있다.
문득

문득. 무언가가 예고 없이 떠오르는 순간을 술 이름으로 삼았다. 영암 청무화과와 영암 쌀만으로 빚는 약주다.
첫 모금은 담백하게 들어오다가 목을 넘긴 뒤에 무화과 특유의 물기 많은 단내가 뒤늦게 올라온다.
기름진 안주보다는 삶은 백골뱅이나 흰살생선회처럼 담백한 쪽이 어울린다. 영암 낙지와의 조합도 시도해보면 재밌지 않을까?
도갓집 무화과 생동동주

도갓집의 얼굴이자 가장 많이 팔리는 술이다. 생무화과를 그대로 갈아 넣어 빚는다.
6도로 낮춘 것은 분명한 의도다. 무화과의 과육감을 살리면서 누구나 부담 없이 마시게 하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누룩취가 거의 없고 입에 닿는 순간 과실의 단맛이 먼저 온다. 술을 어려워하는 사람에게 권하기 좋은 자리에 있다.
대신 물엿과 아세설팜칼륨이 그 단맛을 받쳐준다. 원재료를 따지는 편이라면 문득 쪽을, 마시기 편한 술을 찾는다면 이쪽을 고르면 된다.
같은 집에서 나오는 도갓집 생막걸리도 구성은 비슷하다. 수제 입국을 쓰는 것이 이 집의 오래된 방식이다.
무화과 디저트나 가벼운 샐러드와 맞춰도 좋고, 차게 식혀 여름 저녁에 마시는 쪽이 제 맛이 난다.
기찬양조
영암읍 기찬랜드로 41. 월출산국립공원 안쪽, 기찬빌리지에 양조장이 있다.
‘기찬’은 이 고장 말이다. 월출산에서 뻗어 나오는 기가 유난히 세다고 해서 산 아래 계곡 일대를 기찬랜드라 부른다.
천황봉 자락 맥반석을 지나온 물로 술을 빚는다는 것이 이 양조장의 출발점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2024년 제6회 대한민국 장류발효대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이미지 삽입 위치 — 기찬양조장 또는 도자기병 제품]
월출산 기찬 탁주

물과 찹쌀, 멥쌀, 그리고 누룩으로 만든 무감미료 막걸리다.
입국을 쓰지 않고 누룩만을 사용해 술을 빚는 점을 강조하는 양조장이다.
입국 대신 누룩만으로 발효를 끌고 가면 수율이 떨어지고 맛의 편차도 커진다. 하지만 이 고집이 이 양조장의 개성이라 할 수 있다.
찹쌀과 멥쌀을 함께 쓴 덕에 질감에 무게가 실린다. 누룩에서 오는 구수한 향이 앞에 서고, 단맛은 쌀에서 나온 만큼만 남는다.
월출산 기찬 보라 약주

보라. 자색고구마가 술에 내어놓는 빛깔을 그대로 이름으로 삼았다.
영암은 무화과의 고장이면서 동시에 고구마의 고장이다. 황토밭에서 캐낸 고구마가 이 군의 오래된 소득 작물이었다.
그 고구마를 술로 옮긴 결과물이 보라다. 자색고구마를 가루로 만들어 넣는 방식을 택했다.
여기서도 감미료는 쓰지 않았다. 대신 앞선 탁주와 달리 입국과 누룩을 함께 넣어 발효의 안정성과 향을 동시에 잡았다.
약주로 걸러 13도까지 올린 술이라 무게감이 있다. 고구마에서 오는 은근한 단내가 곡물의 구수함 뒤에 깔린다.
색이 곱게 나오는 술이라 잔을 고르는 재미도 있다. 유리잔에 따라 빛을 통과시켜 보면 이 술의 이름값이 눈으로 확인된다.
보라는 탁주 8도와 약주 13도 두 가지로 나온다. 2024년 9월에는 전라남도가 이달의 전통주로 이 술을 골랐다.
우리술과 힐링
영암읍의 우리술과힐링은 양조장이라기 보단 작은 공방이자 체험장이다. 이곳이 내놓는 술은 고구마로 빚는다.
대표 술의 이름은 ‘보라’. 고구마에서 나오는 고운 빛깔을 그대로 이름에 가져왔다. 약주와 탁주, 막걸리를 함께 빚는다.
술을 파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직접 빚어보는 프로그램과 남도 주안상을 함께 낸다. 영암군 관광두레 주민사업체로 4년째 이어오고 있다.
영암 술 여행 가이드
삼호주조장(도갓집) — 영암군 삼호읍 용앙리. 목포와 붙어 있어 목포 여행과 함께 묶기 좋다. 영암군 공식 쇼핑몰 영암몰에서 온라인 구매가 가능하다.
기찬양조 — 영암군 영암읍 기찬랜드로 41. 월출산 등산이나 기찬묏길 트레킹, 여름 기찬랜드 물놀이와 동선이 겹친다. 방문 전 연락은 필수다.
우리술과힐링 — 전통주 빚기와 주안상 체험은 사전 신청제로 운영된다. 인스타그램 @oolisool에서 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영암읍에서 삼호읍까지는 차로 30분 남짓이다. 산 쪽 양조장과 바다 쪽 양조장을 하루에 도는 것이 어렵지 않다.
